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2 군사반란 (문단 편집) === 정권을 장악한 [[반란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NCGbIWCdTE, 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7FD5sGEtoo, width=100%)]}}} || 군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반란군은 이른바 '[[신군부]]'를 구축한 후 [[5.17 내란|5.17 쿠데타]]를 거쳐 1년도 안 되어 리더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함으로써 정권을 찬탈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전두환]] 정권 7년[* 80년 8월 27일 ~ 88년 2월 24일], [[노태우]] 정권 5년[* 88년 2월 25일 ~ 93년 2월 24일][* 사실 노태우는 논란이 있지만 [[13대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된 것이니 전두환과 동렬로 서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다. 해당 선거에서 수상한 투표용지, 인주가 발견된 상황이 있었지만 이건 뭐 선관위가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21대 총선]]에서도 투표용지 관리를 못해서 길거리에 투표용지가 나뒹굴던 사건이 있었다) [[구로구청 선거부정 항의 점거농성 사건]]에서 구속된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긴 했으나, 13대 대선이 부정선거라서 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경찰이 과잉진압을 해서 피해를 입었기에 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도합 12년 동안 사실상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며 갖은 영화를 누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509041523620102011.jpg|width=100%]]}}}|| || 다음 해 3월 대통령 [[최규하]]에게 중장 '''자진 진급 신고'''를 하는 전두환.[br]왼쪽 안경 쓴 사람은 대장 진급 신고를 마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백석주]]. || * '''[[국군기무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 [[국정원장|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 → 대장 전역 → 대통령 육군을 장악한 전두환은 3개월 후 중장으로 진급한 뒤 불과 5개월 후 대장으로 광속 진급하였으며, 그 와중 현역 장성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직까지 겸임해 군 조직과 정보조직을 장악했다. 이후, [[5.17 내란|5.17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하여 하야시킨 뒤, 기어이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전두환은 쿠데타 선배 [[박정희]]를 오마주한듯 제법 비슷한 행보를 취했다. 박정희의 경우 1961년 5.16 쿠데타 - 1961년 8월 중장 진급 - 1961년 11월 대장 진급 - 1963년 8월 전역 - 1963년 12월 대통령 취임을 했으며,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 - 1980년 3월 중장 진급 - 1980년 8월 대장 진급 - 1980년 9월 대통령 취임을 했다. 사실상 자기가 스스로를 진급시켰다는 점은 똑같았으나 박정희의 경우 군정 이후 직선제를 거쳤지만, 전두환은 정권을 장악한 후 간선제를 거친 [[체육관 대통령]]이라는 점이 다르며 전두환이 좀 더 '광속'[* 박정희 2년 7개월, 전두환 10개월]으로 진행됐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다. * '''[[제9보병사단]]장 소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소장) → 보안사령관(중장/대장) → 대장 전역 → [[여성가족부장관|정무2장관]] → [[문화체육관광부장관|체육부장관]] →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 장관]] → 대통령 노태우는 휘하 9사단의 최전방 부대(29, 30연대)를 무단으로 빼내 반란에 가담시켜 반란군 내 2인자 위치를 확보했다. 직후 논공행상에서 군사정권 최고 요직인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예편한 전두환의 [[기무사령관|보안사령관]] 자리[* 수경사령관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 최고 요직이었다.]를 이어받았다. 이후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하여 정계에 진출, 정무2장관, 체육부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내무부장관 등을 거쳐 12대 총선에서는 집권여당 민주정의당 전국구 1번으로 국회에 진출해 곧바로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어 1987년 6월 항쟁 시기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전두환의 후계자가 되어 13대 대선에서 야권의 분열을 틈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제1군단]]장 중장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중장) → 3군사령관(대장)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대장) → 대장 전역 → [[감사원장]] 육사 10기, 황영시는 반란에 참여한 전두환의 선배 장성들 중에서도 사전에 전두환과 반란에 대한 교감이 제일 높았던 반란의 주도자였다.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대장 진급 코스인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한 뒤 6개월 후 대장으로 진급해, 대장 1차 보직 중 최고 요직인 3군사령관을 차지했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예편한 후에도 부총리급인 감사원장으로 기용되며 영화를 누렸다. *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유학성]]''': 3군사령관(중장) → 대장 전역 → 국가안전기획부장 → 국회의원 정훈장교 1기, 군수차관보[* 이후 소장이 보임되는 군수관리관을 거쳐 군무원 보직이 되었다.]라는 한직에 있던 유학성은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3군사령관을 차지한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대장으로 진급한 뒤 예편한다. 유학성의 임기 중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어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경질되지만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12대, 13대, 14대 3선 의원을 지냈다. * '''[[수도군단]]장 중장 [[차규헌]]''': 육군사관학교장(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2군사령관(대장) → 대장 전역 → 교통부 장관 육사 8기, 5.16군사정변에도 가담한 인물로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내정되나 최규하 대통령의 반대로 인해 취임하지 못했다.[* 본인이 고사했다는 설도 있다.] 이미 논공행상이 끝난 뒤인지라 마땅히 차지할 자리가 없어 일단 한직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가게 된다. 이후 참모차장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해 2군사령관[* 야전군 사령관 중 최고 요직인 3군사령관을 지낸 황영시와 유학성에 비해 야전군 사령관 중 제일 한직인 2군 사령관을 지냈다.]을 지냈으며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 ''' [[제50보병사단]]장 소장 [[정호용]]''': 특수전사령관(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3군사령관(대장) → 육군참모총장(대장) → 대장 전역 → 장관, 국회의원 반란이 끝난 다음 날 오전에 합류한 정호용은 비록 반란에 공은 없었으나 전두환과 노태우와 절친한 하나회 창립멤버로서 이후 3인자로서 승승장구했다. 반란 직후 논공행상에서 정병주를 대신해 특수전사령관으로 영전했으며 황영시처럼 3군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육사 동기인 친구 전두환의 정권과 친구 노태우의 정권에서 영화를 누렸다. * ''' [[제20보병사단]]장 소장 [[박준병]]''':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소장) → 보안사령관(중장/대장) → 대장 전역 → 국회의원 1등 공신 [[박희도]]와 달리 반란에서 활약한 바는 적지만 박준병은 같은 하나회 12기 멤버 [[박희도]], [[박세직]]과 더불어 '쓰리박'으로 불리며 5공화국 초기 군부 실세로 꼽혔다. 소장 최고 요직인 인사참모부장을 지낸 후 군사정권 최고 요직인 보안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이후 1984년 12월에 정계에 차출되어 대장 예편한 뒤,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민정당/민자당의 사무총장으로서 승승장구했다. * ''' 육군보병학교장 소장 [[김윤호(군인)|김윤호]]''': 1군단장(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1군사령관(대장) → 합동참모본부의장(대장) → 대장 전역 → 공기업 사장 반란 직후 동기 황영시의 요청으로 반란군에 합류한 김윤호는 이후 6인 위원회(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김윤호, 전두환, 노태우)의 일원으로 군부 내 논공행상 및 반대파 숙청 작업에 참여했다. 원래 육군보병학교장은 소장 한직 중 하나였으나 반란을 계기로 입지가 달라진 셈이었다. 또한 미군과의 교섭 작업도 맡은 공으로 명실상부한 신군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후 황영시만큼은 아니어도 대가를 톡톡히 누렸다. 대장까지 진급했고 비록 당시에는 명예직이었지만 합참의장까지 역임했다. * ''' [[제71보병사단|제71방위사단]]장 준장 [[백운택]]''': 9사단장(소장) → 정보사령관(소장) → 1군단장(중장) → 사망 동기인 전두환을 형님처럼 모셨던 백운택은 동기들에 비해 많이 뒤쳐져있던[* 일단 71사단장 자체는 말년 준장이 보임되는 한직이다.] 본인의 입지를 역전시키기 위해서인지 반란에 적극 가담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얻어내기 위해 반란군 멤버들이 최규하 대통령을 설득하던 자리에서는 일부러 품에 있던 권총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 덕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요직인 9사단장도 맡고,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까지 지냈으나 재임 중 사망하여 더 이상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 ''' [[제1공수특전여단]]장 준장 [[박희도]]''': 26사단장(소장) → 특수전사령관(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3군사령관(대장) → 육군참모총장(대장) → 대장 전역 직속상관이자 은인인 정병주를 배신[* 1976년 전두환의 간청을 받아 1공수여단장이 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했던 점, 1978년 무장공비의 1공수여단 위수지역 통과사건에 보직해임 위기를 맞은 박희도를 정병주가 당시 육군참모총장 대장 이세호 앞에서 간곡히 간청하여 구해줬던 두 번의 은혜를 배신한 셈.]한 대가는 참으로 달콤했다. 반란의 1등 공신이자 전두환의 직계 충복으로서 전두환 정권 내내 승승장구했다. 쿠데타 당시 준장이었는데 불과 4년 만에 대장까지 광속 진급했으며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본래 하나회 동기 [[박준병]], [[박세직]]에 비해 진급이 1년 뒤진 후발 주자였으나 모두 제치고 기어이 참모총장이 되었다. 또한, 2년의 참모총장 임기가 끝난 뒤에도 전두환에 의해 임기가 1년 유임되며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후 전두환과 결별하고 전두환계 군맥을 숙청한 노태우에 의해 해임되어 강제 예편당했으며 두 번 다시는 공직을 맡지 못했다. * ''' 3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최세창]]''': 20사단장(소장) → 수도경비사령관(소장) → 1군단장(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3군사령관(대장) → 합동참모본부의장(대장) → 대장 전역 → 국방부 장관 박희도와 마찬가지로 직속상관인 정병주를 배신한데다 심지어 체포하기도 했던 최세창 역시 달콤한 배신의 대가를 누렸다. 전두환의 직계 충복 중 하나로 5공화국에서 내내 승승장구했으며 비록 전두환의 최고 충복 중 하나인 박희도의 임기 유임으로 인해 참모총장은 되지 못했지만 대신 명예직인 합참의장까지 지내며 영화를 누렸다. 전두환계였음에도 후일 노태우에게도 등용되어 국방부 장관도 역임했다. * ''' 5공수특전여단장 준장 [[장기오]]''': 수도사단장(소장) → 수도군단장(중장) → 교육사령관(중장) → 중장 전역 → 총무처 장관 박희도, 최세창과 함께 불법적으로 휘하 공수특전여단 실병력을 동원한 3인방이지만 효창운동장에서 예비대로 대기만 한 까닭에서인지 요직도 별로 맡지 못한 편이며[* 하지만 수도사단장은 요직이 맞다. 물론 애매한 포지션인 수도군단장은 그렇다 쳐도 교육사령관 자체는 중장 중에서도 한직이다.] 대장을 달지 못했고 중장으로 전역했다. 예편 후에 총무처 장관으로 보상받았다. * '''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대령 [[허화평]]''': 준장 전역 →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 → 청와대 정무제1수석비서관 → 국회의원 전두환의 비서실장으로 반란에서 전두환의 책사로 맹활약한 허화평은 전두환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 준장 계급장만 달고 예편한 뒤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에 임명되었는데,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허화평을 위해서 만들어진 전무후무한 자리였다. 대통령 집무실 바로 밑 사무실에서 모든 정보를 장악한 사실상의 비서실장 자리였다. 군사 반란과 정권 장악에 있어 책사로 맹활약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전두환의 눈 밖에 나기 전까지 명실상부한 전두환 정권 초기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조금씩 전두환의 눈 밖에 나던 허화평은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중에 완전히 전두환의 눈 밖에 나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당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국회의원을 지내다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으로 심판받았다. * '''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대령 [[허삼수]]''': 준장 전역 → 청와대 사정수석 → 국회의원 허화평과 단짝으로 전두환의 핵심 참모였으며, 12·12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한 허삼수는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준장으로 예편한 뒤 전두환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 사정수석 비서관으로서 실세로 군림하며, 정부 최고 사정기구로 창설된 '사정협의회'의 의장으로서 관가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전두환의 눈 밖에 나 청와대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향했다. 허화평과 마찬가지로 귀국한 이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으로 심판받았다. * ''' 보안사령부 수사2과장 중령 [[이학봉]]''': 준장 전역 → 청와대 민정수석 →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 → 국회의원 수사와 공작 전문가로 반란과 전두환 정권 창립 과정에서 진압군 장성들, 정치인, 재야인사들의 수사와 조사를 지휘한 이학봉은 허화평, 허삼수와 함께 전두환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갔다.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았으며, 전두환과 불화를 겪고 쫓겨난 허화평, 허삼수와 달리 전두환 정권 내내 전두환의 충복으로 정권 유지 작업 등에서 활약했다.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을 보좌하는 안기부 2차장을 지내며 [[평화의 댐]] 건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 관여했다. 이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5공 비리 청산으로 단죄되었다. * '''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 대령 [[장세동]]''': 특수전사령부 작전참모(준장) → 3공수특전여단장(준장) → 경호실장(소장/중장) → 중장 전역 → 국가안전기획부장 전두환의 최고 충복으로 꼽히는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전두환의 경호실장이 되어 비록 군은 떠나야했지만 경호실장[* 심지어 경호실장을 하며 준장에서 소장을 거쳐 중장까지 갔다.]과 안기부장을 역임하며 전두환의 후계자로도 꼽히는 등 정권의 최고 실세로 꼽혔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정권 유지를 위한 갖가지 공작에 관여 하였고, 결국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정권이 끝나자 정권 내 여러 범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옥 신세를 졌다. * '''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장 대령 [[김진영(군인)|김진영]]''':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준장) → 경호실 차장보(준장/소장) → 수도사단장(소장) → 3사관학교장(소장) → 수도경비사령관(중장) → 교육사령관(중장) → 한미연합부사령관(대장) → 육군참모총장(대장) → 대장 전역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과 함께 직속상관 장태완의 명령을 무시하고 반란에 가담한 김진영은 명실상부한 하나회의 대표 주자이자 차기 육군참모총장으로 꼽혔으나 강직한 성격과 정치적 흐름으로 인해 군생활은 나름대로 파란만장했다. 사단장 시절, 상부의 부정선거 동참 지시를 거부하여 좌천당했고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활한 후에는 노태우의 전두환계 군맥 제거 작업으로 또 좌천당했다. 여러차례의 고초를 겪었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끝내 부활하여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긴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대숙청의 첫 타자로 숙청당했다. * ''' 9사단 29연대장 대령 [[이필섭]]''': 9사단장(소장) → 1군단장(중장) → 육군사관학교장(중장) → 2군사령관(대장) → 합동참모본부의장(대장) → 대장 전역 반란 당시 사단장 노태우의 명을 받아 최전방 29연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출동했다. 그 역시 하나회 멤버였으며 노태우의 직계 군맥에 속해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대장까지 진급해 합동참모본부의장[* 당시에는 정부의 군 개혁으로 군령권이 주어져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명예직이 아니었다.]을 지냈다. 재임 시절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더불어 김영삼에게 숙청당했다. * '''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정동호(1935)|정동호]]''': 경호실장(준장/소장) → 5군단장(중장) → 육군참모차장(중장) → 중장 전역 → 국회의원 전두환의 명을 받아 하나회 후배 [[고명승]] 경호실 작전담당관과 함께 경호실 병력을 불법 동원해 총리 공관을 점거, 최규하 대통령[* 당시 취임식 전이므로 총리 공관에 있었다.]을 사실상 연금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정식으로 경호실장을 지냈으며 최세창과 더불어 하나회 육사 13기의 선두주자로 꼽혔으나 참모차장 시절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 이후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 '''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고명승]]''': 경호실 차장(준장) → 9사단장(소장)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소장) → 수도경비사령관(중장) → 보안사령관(중장) → 3군사령관(대장) → 대장 전역 하나회 선배인 [[정동호(1935)|정동호]] 경호실장 직무대리와 함께 경호실 병력을 불법 동원해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 연금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전두환계 군맥으로 전두환 정권에서 승승장구했으며 군사정권의 최고 요직인 인사참모부장,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 3군사령관을 모두 역임하며 영화를 누렸다. 육군참모총장까지 따놓은 당상인 셈이었으나 노태우가 취임한 뒤 전두환계 군맥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고명승은 2년 임기는 채우나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고 전역했다.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특전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특전사령부의 직할부대인 [[제707특수임무단|707특임대]]를 창설하게 된다. 3공수여단의 반란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던 무방비 상태의 특전사령부 본부가 너무 쉽게 접수되자, 나중에 혹시나 자신들도 똑같이 [[역관광]]을 당할까봐 특전사령관을 호위하는 사령관 직속 무장병력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만든 것이다. 특전사령부는 기존 3공수여단의 영내가 아닌 독자적인 공간을 가진 3공수여단 바로 옆의 부지로 옮겨지게 되었고 707특수임무대대도 그곳에 위치하게 된다. 이후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역쿠데타나 하극상의 우려가 희박해져서 사령관 보호라는 임무는 차차 없어졌고,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면서 대테러 전문 임무 쪽에 전념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